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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긴다’보다 ‘참여한다’는 말이 더 정확한 순간들

by 양파 까는 양파쿵야 2026. 1. 11.

이 축제에는 관객석이 없다
‘즐긴다’보다 ‘참여한다’는 말이 더 정확한 순간들

많은 축제는 관객을 전제로 만들어집니다. 무대가 있고, 그 앞에 사람들이 서서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즐긴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는 이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축제들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구경꾼으로 머무는 것이 오히려 어색합니다. 축제는 이미 시작되어 있고, 그 안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서 있거나, 움직이거나, 함께하거나. 이 축제들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가 아니라, 어디까지 참여했는지입니다.

오늘은 관객석이 없는 축제, 직접 참여하며 즐기는 축제들에 대해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즐긴다’보다 ‘참여한다’는 말이 더 정확한 순간들
‘즐긴다’보다 ‘참여한다’는 말이 더 정확한 순간들

보는 순간, 이미 끌려 들어가는 축제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라 푸에스타 데 로스 로코스(Fiesta de los Locos) 같은 축제에서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 무대도, 시작 신호도 없다. 사람들이 이상한 옷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축제는 이미 진행 중이다. 이때 가장 어색한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가만히 서 있으면, 누군가 말을 걸고, 손짓을 하고, 가면을 씌운다. 관객으로 남을 선택지는 거의 없다.

이 구조는 우연이 아니다. 이런 축제는 의도적으로 구경을 허용하지 않도록 설계된다. 축제의 목적이 보여주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위치에 서야 의미가 생긴다. 누군가가 바라보는 사람으로 남는 순간, 공동체의 균형이 깨진다.

이탈리아의 이브레아 오렌지 전쟁(Battaglia delle Arance)도 비슷하다. 거대한 오렌지 싸움이 벌어지는 이 축제에서, 참가자와 비참가자의 구분은 있지만 ‘완전한 관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 순간, 오렌지는 날아온다. 이 축제는 안전한 거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이벤트가 아니라, 몸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이다.

역할을 맡는 순간, 축제는 공동체가 된다

참여형 축제의 핵심은 역할 분담이다. 일본의 기온 마쓰리(Gion Matsuri)를 떠올려보면, 이 축제는 화려한 수레와 행렬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수백 개의 역할이 촘촘히 나뉘어 있다. 수레를 끄는 사람, 의상을 관리하는 사람, 의식을 준비하는 사람. 이 역할은 축제 당일에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대부분은 오랜 시간 지역 안에서 이어져 내려온다.

중요한 점은, 이 축제에서 관객은 주변부에 머문다는 것이다. 중심은 언제나 ‘맡은 역할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축제를 경험한 사람들은 “봤다”기보다 “잠시 그 안에 있었다”고 말한다. 참여는 선택이 아니라, 축제의 전제 조건이 된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열리는 에곤군(Egungun) 축제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면을 쓴 사람들은 단순한 퍼포머가 아니라, 조상의 영을 대신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때 주변 사람들은 박수를 치는 관객이 아니라, 의식에 반응하는 참여자다. 노래를 부르고, 공간을 비워주고, 특정 행동을 삼간다. 이 모든 것이 참여다.

참여형 축제가 남기는 가장 큰 감각, ‘소속’

이런 축제를 경험하고 나면 묘한 감각이 남는다. 재미있었다는 기억보다, 어딘가에 속해 있었다는 느낌이 더 오래 지속된다. 참여형 축제는 개인의 감정을 증폭시키기보다, 개인을 집단의 리듬 속에 녹여낸다. 그래서 축제가 끝난 뒤에도 여운이 길다.

멕시코의 일부 마을에서 열리는 테키오(Tequio) 전통 행사는 축제와 노동의 경계에 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길을 정비하고, 음식을 나누며 하루를 보낸다. 이 행사는 외부인에게는 축제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분명한 축제다. 공동의 시간을 나누고, 공동의 책임을 확인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런 축제에서 관객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동등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더 화려한 역할을 맡고, 누군가는 조용한 역할을 맡지만, 그 차이는 위계가 아니다. 모두가 빠지면 안 되는 존재라는 전제가 있다. 그래서 참여는 곧 존중의 방식이 된다.

 

현대의 많은 축제는 보여주기 위해 설계된다. 하지만 참여를 전제로 한 축제들은 정반대의 방향을 택한다. 이 축제들은 묻는다. “너는 볼 것인가, 함께할 것인가.”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관광객이 아니다.

‘즐긴다’는 말은 때로 거리를 만든다. 반면 ‘참여한다’는 말은 책임과 관계를 포함한다. 참여형 축제는 우리에게 잠시나마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허락한다. 그 경험은 화려하지 않을 수도 있고,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축제들은 오래 기억된다.

이 축제들에는 관객석이 없다. 대신, 사람 사이에 빈자리가 없다. 그리고 그 촘촘함 속에서 우리는 축제의 가장 오래된 의미를 다시 만나게 된다. 함께 모이고, 함께 움직이고, 함께 책임지는 것. 어쩌면 이것이 축제가 시작된 가장 처음의 이유였을지도 모른다.